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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원천석 원천석(元天錫, 1330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두문동 72인중 1인이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었지만, 즉위 후에는 벼슬을 거절한다. 고려의 수절신으로 추앙받는 운곡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7월 8일 원주 원씨 시조인 원경(元鏡)의 19대손인 원윤적(元允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이방원(태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내놓고 강원 원주땅의 치악산(稚岳山)으로 숨어서 젊은이들을 지도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그를 기용하려고 자주 불..
공양왕과 이성계의 동맹 공양왕은 정몽주 마저 죽은 뒤 이성계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여 신하인 시중 이성계와 동맹 맺을 계획을 세운다. 1392년(공양왕4년) 7월 공양왕은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와 동맺을 맺으려 하니 맹세의 글을 받아오도록 지시한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주상의 말씀에 따라 기초해 보도록 하라." 고 하자 다음과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 "경이 없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앉았겠는가? 그러니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로다. 내가 경을 저버리는 일이 있을 경우 이 맹세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초안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좋다고 했다. 공양왕은 며칠뒤 이성계의 집에으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동맹식을..
이성계 낙마와 정몽주의 최후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왕석)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눕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를 기회삼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지만 이방원이 이성계를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무산된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문병차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이방원은 회유의 시조 에 로 거절한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귀가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전 귀가하며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옥사,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 공양왕 2년(1390)에 고려 무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 일파의 정변을 막기 위해, 명나라 주원장에게 무고(거짓으로 보고함)한 사건이다. -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 - 이를 반대한 이색 등 고려 재상 19인이 살해/감금/유배 될 것이다. -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다. -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다. 어색한 무고로 명나라로 하여금 시중 이성계를 없애려 하였지만, 이성계의 측근 정도전이 명나라로 가서 해명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대 세력인 고려 유신 10여명(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신돈의 후예 공민왕(고려31) - 우왕(고려32) - 창왕(고려33) - 공양왕(고려34). 공민왕과 공양왕 사이에 낀 우왕과 창왕은 정통인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인 신씨(辛氏)라는 주장으로 인해 폐위까지 이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들임)'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내몰아 죽이게 되는데, 우왕의 출생배경을 돌아보면 이러하다. 신돈에게 '반야'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공민왕에게 바쳐 아들인 우왕을 낳게 되는데, 우왕은 출산부터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게 되고, 7살이 되던 해(공민왕20년)에 궁궐에 입성하게 된다. 공민왕은 우왕의 정통성 논란을 예견하고, 우왕은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발표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
위화도 회군 고려말기 1388년(우왕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신/구 세력의 교체가 진행되어 고려 충신인 최영이 축출되고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철령(鐵嶺) 이북 지역의 고려 지역 반환을 요구해왔다. 마찬가지로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는데 우왕은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지만, 최영에 의해 강행된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