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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History (Korea)/1392-1897 2016. 12. 13. 13:42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한다.

황희와 투톱 체제로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다. 황희는 강직함 담당, 맹사성은 융통성 담당.


-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 1386년에 춘추관검열이 되고,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 

- 최영의 손녀 사위로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은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중용하였다.

- 태종 때에 태종의 사위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의 역모 사건을 취조하다가,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 세종의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다.

- 교육과 제도 정비 등으로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편찬을 돕고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자식에게 절을 하여 술버릇을 가르쳤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출줄 알았다.

또한 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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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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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History (Korea)/1392-1897 2016. 12. 12. 03:52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정치가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때문에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로 송경(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 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 기억력이 크게 뛰어났다.

- 1376년(우왕 2년)에 음서 제도로 출사하였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 이후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으나 임금의 명령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번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한다.

- 태종은 정승인 박석명의 추천 덕분에 황희를 중용하게 되고, 개국공신 대접 및 매일 불러 접견하는 등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 1418년(태종 18년) 양녕대군 폐위 후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 남원에서 유배중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태종의 부탁 및 그의 사람됨을 보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 1431년(세종 13년) 69세 때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음을 주장,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하고, 급한 성품을 고쳐 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고도 한다.

청백리로 알려진 반면, 의도적인 청렴함, 친인척 부패 옹호, 간통, 범죄자 은닉, 청탁 등의 논란이 많다. 이 정도 논란이면 청백리는 아닌걸로...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황희선생 유적지가 있다. 방촌유적지, 반구정...



* 황희가 세종의 사랑을 받은 증거.


세종 13년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닌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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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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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History (Korea)/1392-1897 2014. 11. 14. 00:14

 

 

 

호정 하륜(1348년 1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다.
태종의 최측근 인사이자 책사의 한 사람으로,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 했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
정몽주의 문하생 권근,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고,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동생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는데 정안대군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여 이방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후 그의 심복이 되었다.
정권을 잡게 되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불시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제거했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는 박포 일당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한 뒤 회안대군 이방간, 맹종 부자와 박포를 체포, 박포 일파를 죽이고 회안대군 부자를 유배시켰다.
태종 즉위 후 적서 차별, 호패법, 신문고, 저화(화폐) 사용 등을 건의, 불교를 비판하고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도 공이 컸다.
후에 인사 청탁을 많이 받는다거나 정책을 태종과의 밀담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비판을 샀다.
 

 

  • 공민왕14년(1365) : 문과에 급제, 이인미의 딸과 결혼.
  • 공민왕17년(1368) : 감찰규정을 지내고 있을 때 신돈을 공박하다가 좌천/파직 됨.
  • 공민왕20년(1371) :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고 교주·강릉 도찰방에 오름.
  • 우왕6년(1380) :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우왕9년(1383) : 어머니 3년 상을 마친뒤 복직.
  • 우왕11년(1385) : 명나라의 사신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음.
  • 우왕14년(1388) : 최영의 요동 공격을 불가능하다며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 최영 처형 뒤 복직.
  • 공양왕3년(1391) : 전라도도순찰사가 되고 조선의 건국에 참여.
  • 공양왕4년(1392) :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으나, 이성계가 즉위 후 경기좌우도관찰사에 기용.
  • 태조2년(1393) : 한양 천도 적극 주장.
  • 태조4년(1395) :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했으나 곧 기복되어 복직.
  • 태조5년(1396) : 명나라 홍무제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정도전을 소환하였는데, 대신 명나라에 들어가 해명.
    (이 과정에서 정도전으로부터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탄핵받고 파면,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복직, 충청도도순찰사가 됨)
  • 태조7년(1398) :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문하우정승까지 승진.
  • 태조9년(1400) :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권력의 실세가 됨.
  • 정종2년(1400) :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진산부원군, 좌명공신 1등에 책록.
  • 태종1년(1401) : 관직을 사임했다가 다시 복귀. 문하생 윤회가 과거에 급제하여 적극적으로 후원.
  • 태종16년(1416) : 영의정부사까지 역임하고 노환을 이유로 치사 후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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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고려 유신들은 개성에 남아 남동쪽에 있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 앉았다. 그 안에서 고려 유신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명이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고 하게 되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가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게 하여, 72인은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세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황희도 이때 두문동에 있었으나 마음을 바꿔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개성에 남은 선비들은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고,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개성상인' 이 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이 두문동에 관한 일은 1809년(순조9)에 만들어진 <두문동실기> 에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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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457~1495, 재위 1469~1495)은 조선의 제9대 임금이며, 성은 이(李), 휘는 혈(娎)이다.

 

 

왕위 계승

 

세조의 장남이자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 그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
왕위를 계승해야 할 예종의 원자, 의경세자의 장자를 제치고 성종이 왕이 된 것은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장인인 한명회가 결탁하여 결정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살이 될 때까지 7년동안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섭정 당시의 정치적 감각 덕분에 조정이 안정되었다. 수렴청정 기간의 모든 결정권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고, 친정을 시작한 이후 성종은 권신들을 축출하고 길재, 김숙자의 문하생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사림파 / 문화 / 외교

 

친정이 시작되고 임사홍, 유자광 등을 축출하였으며 사림파 김종직 등을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켜 훈구파를 견제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이 되었으며 문화 정책을 펴 <경국대전> 완성하고 반포,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및 간행하였고, <경국대전> 에는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삽입하여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을 받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압록강, 두만강, 함길도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

 

 

후궁간의 갈등

 

첫 부인,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는 18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였고, 첫번째 후궁 숙의 윤씨(폐비 윤씨)를 두번째 왕비로 간택하였다. 숙의 윤씨는 신숙주의 조카로 성종과 다른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여색을 밝히는 성종의 오른쪽 뺨에 손톱자국을 내어 폐서인되었는데 인수대비와 원로 훈신들의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 후 다른 후궁인 정현왕후 윤씨를 왕비로 삼게 되고 이는 중종의 생모가 된다.

 

 

최후

 

재위기간 25년 내내 선정을 베풀었던 성종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승하하였고, 능은 선릉(宣陵)으로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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