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맹사성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한다.황희와 투톱 체제로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다. 황희는 강직함 담당, 맹사성은 융통성 담당.-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에 춘추관검열이 되고,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 - 최영의 손녀 사위로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은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중용하였다.- 태종 때에 태종의 사위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의 역모 사건을 취조하다가, ..
황희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정치가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다.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때문에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로 송경(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 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 기억력이 크게 뛰어났다.- 1376년(우왕 2년)에 음..
하륜 호정 하륜(1348년 1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다.태종의 최측근 인사이자 책사의 한 사람으로,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 했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정몽주의 문하생 권근,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고,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동생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는데 정안대군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그리하여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여 이방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졌..
운곡 원천석 원천석(元天錫, 1330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두문동 72인중 1인이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었지만, 즉위 후에는 벼슬을 거절한다. 고려의 수절신으로 추앙받는 운곡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7월 8일 원주 원씨 시조인 원경(元鏡)의 19대손인 원윤적(元允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이방원(태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내놓고 강원 원주땅의 치악산(稚岳山)으로 숨어서 젊은이들을 지도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그를 기용하려고 자주 불..
두문동 72인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힘을 썼다.하지만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고려 유신들은 개성에 남아 남동쪽에 있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 앉았다. 그 안에서 고려 유신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명이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고 하게 되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가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게 하여, 72인은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 당했다고 전해진다.세종 때에 영의정..
공양왕과 이성계의 동맹 공양왕은 정몽주 마저 죽은 뒤 이성계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여 신하인 시중 이성계와 동맹 맺을 계획을 세운다.1392년(공양왕4년) 7월 공양왕은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와 동맺을 맺으려 하니 맹세의 글을 받아오도록 지시한다.이에 이성계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주상의 말씀에 따라 기초해 보도록 하라." 고 하자 다음과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 "경이 없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앉았겠는가? 그러니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로다. 내가 경을 저버리는 일이 있을 경우 이 맹세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초안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좋다고 했다.공양왕은 며칠뒤 이성계의 집에으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동맹식을 거행..
이성계 낙마와 정몽주의 최후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왕석)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눕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를 기회삼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지만 이방원이 이성계를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무산된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문병차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이방원은 회유의 시조 <하여가>에 <단심가>로 거절한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귀가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전 귀가하며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옥사,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고려시대 최후의 임금 공양왕 2년(1390)에 고려 무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 일파의 정변을 막기 위해, 명나라 주원장에게 무고(거짓으로 보고함)한 사건이다. -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 이를 반대한 이색 등 고려 재상 19인이 살해/감금/유배 될 것이다.-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다. 어색한 무고로 명나라로 하여금 시중 이성계를 없애려 하였지만, 이성계의 측근 정도전이 명나라로 가서 해명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대 세력인 고려 유신 10여명(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