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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정치가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때문에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로 송경(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 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 기억력이 크게 뛰어났다.

- 1376년(우왕 2년)에 음서 제도로 출사하였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 이후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으나 임금의 명령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번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한다.

- 태종은 정승인 박석명의 추천 덕분에 황희를 중용하게 되고, 개국공신 대접 및 매일 불러 접견하는 등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 1418년(태종 18년) 양녕대군 폐위 후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 남원에서 유배중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태종의 부탁 및 그의 사람됨을 보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 1431년(세종 13년) 69세 때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음을 주장,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하고, 급한 성품을 고쳐 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고도 한다.

청백리로 알려진 반면, 의도적인 청렴함, 친인척 부패 옹호, 간통, 범죄자 은닉, 청탁 등의 논란이 많다. 이 정도 논란이면 청백리는 아닌걸로...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황희선생 유적지가 있다. 방촌유적지, 반구정...



* 황희가 세종의 사랑을 받은 증거.


세종 13년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닌 집착...